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티에르 (문단 편집) ===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 * 자세한 내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파리 코뮌]] 항목 참고. [[1870년]] [[엠스 전보 사건]]에서 [[보불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티에르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반대했다. 하지만 프랑스 내 다수의 반응은 전쟁을 원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여론에 휩쓸린 [[나폴레옹 3세]]는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프로이센 왕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가 [[스당 전투]]에서 제대로 박살난다.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스당에서 항복해 포로로 잡힌 직후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제2제국은 붕괴된다. 앞서 전쟁을 반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준 덕분에 티에르의 정치적 위상은 급상승했고 임시 정부는 그에게 입각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항전을 결의한 임시 정부와 달리 티에르는 조기 강화협상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입각을 고사한다.[* 그리고 굴욕적인 종전 이후 '티에르가 하자는 대로 일찍 강화했으면 이런 개쪽은 안 당했을거 아니냐'라는 여론이 대두되면서 티에르는 패전에 대한 비난 여론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프로이센군이 파리 시내에서 하루종일 승전 퍼레이드를 펼치는 것을 허락해서 미친듯이 까이긴 했다.(...) 단지 패전이 티에르의 책임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 대신 임시정부는 그에게 외교 특사를 맡겨서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바이에른 왕국]], [[러시아 제국]] 등의 개입을 이끌어 보려고 했지만 프로이센에는 당대 최고의 외교 천재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있었고, 비스마르크가 전쟁 이전에 이미 다 손을 써놨던 탓에 여타 열강들의 개입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1871년]] 2월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는 항복을 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고, 티에르는 임시정부의 수장 겸 협상단 대표로 강화교섭을 진행한다. 하지만 1871년 3월 굴욕적인 강화[* 파리 시내에 설치된 모든 대포를 철거할 것을 비스마르크가 요구했다.]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그 당시 티에르를 두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매국노라고 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던만큼 티에르가 실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이 많진 않았다. 일단은 티에르 역시 기분이 좋진 않았는지 비스마르크와 강화교섭을 끝내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고 전해진다.] 일시적으로 밀린 티에르와 임시정부는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다. 한편 파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정부가 수립되니,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 파리 코뮌과 임시정부 간의 대치는 5월까지 이어졌지만 결국은 프로이센군의 지원[* 특히 프로이센이 보불전쟁 시기 스당과 메츠에서 잡은 군인 포로들을 석방했는데 이들이 파리 코뮌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을 받은 티에르의 임시정부가 코뮌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나폴레옹 3세를 조졌던 [[독일 제국]]에선 프랑스에 보나파르트 제정을 복고하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비스마르크의 반대파인 주불 독일 대사인 하리 폰 아르님 백작. [[빌헬름 1세|빌헬름 황제]]도 이에 지지를 표명했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이어야 군주국들의 대불 동맹이 유지될 수 있다고 프랑스 공화국의 유지를 강행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아르님 백작이 티에르 정부는 곧 공산주의자들이나 군부 독재로 대체될 것이 뻔하니 독일에서 쿠데타를 사주하여 왕정을 복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결국 대사건으로 번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